국정 농단 사태 이후 존재감이 미미했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혁신안을 발표했다.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김병준 회장 직무대행 체제 3개월여 만에 나온 결과다. 김 직무대행은 지난 18일 기자 간담회를 열고 “전경련이 정부 관계에 방점을 두고 회장·사무국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과거의 역할과 관행을 통렬히 반성한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앞으로 건전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자유뿐만 아니라 공정한 분배 등의 역할도 하겠다”면서 혁신안을 내놓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이날 발표한 혁신안의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경제인협회로 기관명의 변경이다. 이 명칭은 1961년 전경련 설립 당시 사용한 이름이다. 이와 관련해 김 권한대행은 쇄신과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름을 변경하는데 있어서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둘째, 윤리경영위원회를 설치하고 ‘윤리헌장’을 제정이다. 과거 지나친 정부와 관계를 중시하다 국정 농단 사태와 같은 불상사가 이러난 것으로 보고 정경유착을 차단하는 장치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셋째는 전경련과 한국경제연구원(한경련)을 통합해 싱크탱크형 경제 단체로 환골탈퇴다. 전경련의 산하 경제연구소인 한국경제연구원을 흡수·통합해 연구 기능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과거 전경련은 기업 관련 이슈가 발생하면 그때그때 대응하던 수동적인 방식에 그쳤지만, 앞으로는 전경련이 쌓아온 네트워크와 한경련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글로벌 수준에서 정책을 선제적으로 개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기관으로 거듭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발표된 혁신안은 전혀 새롭지 않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전경련의 개혁’의 이야기할 때마다 언급되었던 단골 메뉴들이다. 2016년 국정 농단 사태 직후 전경련이 존폐의 위기에 몰리자 혁신 태스크포스(TF)를 꾸린 후 ‘한국기업연합회’로 이름 변경을 시도했다가 흐지부지 된 적이 있다. 지난해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도 새로운 역할을 기대하면서 명칭 변경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경련과 통합과 싱크탱크형 경제 단체로 전환 역시 여러 번 나왔던 안(案)이다. 전경련의 개혁 혹은 향후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야기하면 꼬리처럼 붙어 다니는 것이 ‘한국형 헤리티지 재단’의 설립이고, 여기에는 연구 기능을 가진 한경련과 통합이 항상 중심 과제로 논의되었다. 올해 초에는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이 전경련과 경총이 통합해 전문적인 연구와 조사활동을 기반으로 국가발전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헤리티지 재단과 같은 싱크탱크 설립이 필요하다며 전경련의 역할 전환을 제시한 바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윤리경영위원회 설치와 ‘윤리헌장’ 제정은 참신하지 않다는 수준을 넘어서 진부하기까지 하다. 국정농단 사태 이전부터 전경련은 ‘윤리 경영’과 ‘사회 공헌’은 가장 비중 있게 다룬 과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윤리 경영보다는 정경 유착에 더 가까웠고, 사회 공헌을 한답시고 어버이연합과 같은 단체를 지원한 것은 훌륭한 제도를 두고도 운영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윤리헌장을 제정한다고 해서 전경련이 앞으로 윤리적으로 변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임 회장과 임원진이 보신주의에 빠져 엄두를 내지 못했던 전경련 혁신안을 김병준 권한대행이 자신 있게 발표한 것은 이전과 비교해 그나마 진일보한 조치라 평가할 만하다. 김 권한대행이 정치인 출신으로 현 정부 실세 중 한명이라 가능했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문제는 대행 체제가 끝나면 ‘도로 전경련’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에 발표된 혁신안이 혁신적이지도 않고, 과거에도 정경유착이라는 더 편한 길을 택했을 뿐 몰라서 안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경련은 국정 농단 사태로 인해 정계와 재계 그리고 국민 모두에게 신뢰를 잃는 사면초가에 빠져 무너졌다. 그런데 최근 행보를 보면 새 정부와 어느 정도 교감을 이루면서 정계(현 정부와 여권 일부)의 신뢰는 일부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4대 그룹 등 재계는 아직까지 전경련의 혁신에 대해 한걸음 물러나 지켜보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국민은 전경련의 혁신안에 대해 신뢰는커녕 관심조차 주지 않고 있다. 한 경제인은 이번 전경련의 혁신안에 대해 감동이 없다고 말한다. 다수 언론은 4대 그룹을 재가입 시키기 위한 꼼수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꼼수이기 때문에 감동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전경련이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재계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헤리티지 재단과 같은 싱크탱크형 경제 단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 정부와 재계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국민 경제 활성화와 시장경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객관적인 정책 개발과 제언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원호 비즈빅테이터연구소장(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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