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호의 경제톡> 미·중 갈등 격화 속 우리의 전략은
2024-11-18
1970~80년대는 일본 제조업의 전성기였다. 일본 제품은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하며 품질과 기술력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일본 기업들은 전자제품과 반도체, 자동차, 조선, 카메라 등 다양한 산업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였다. 소니 TV는 가전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으며, 파나소닉은 가정에 필수적인 생활 가전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니콘과 캐논 카메라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표준으로 여겨졌고, 세이코 시계는 스위스 시계 산업을 넘어섰다. 닌텐도는 게임 산업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기간산업과 중공업 분야에서도 일본 기업의 약진은 두드려졌다. 도시바는 반도체 시장서 세계 1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도요타, 닛산, 혼다 등 일본 자동차는 연비 효율성과 내구성을 바탕으로 미국은 물론이고 글로벌 시장에서 판매량을 늘려갔다. 야마하는 고성능 오토바이로 세계적으로 사랑받았다. 미쓰비시 중공업과 가와사키 중공업은 조선업과 항공우주 산업에서 기술적 우위를 점하며, 일본은 해양과 항공 분야에서도 중요한 국가로 떠올랐다.
이러한 일본 제조업의 성공은 전 세계 오지까지 침투할 만큼 널리 퍼졌다. 실제로 한 탐험가가 아마존 깊숙한 지역을 탐험하던 중, 문명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원주민 마을에서 일본산 모기향을 발견한 일화는 당시 일본 제품이 세계 곳곳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소개되었다. 이처럼 일본의 제조업은 당시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핵심 동력이었으며, 일본은 ‘세계의 공장’으로 불릴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당시 일본 제조업의 성공에 대해 일각에서는 일본 기업이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먼저 개발된 기술을 빠르게 모방하고 이를 상업화하는 전략에 의존했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일본 기업들은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기존 제품을 개선하고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분야에서는 탁월했다.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나 혁신적인 발명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 기업 혹은 일본 제품들의 이러한 전략은 초기 단계에서 해외 시장에 진출하고 안착하는 데 있어서는 성공적인 성과를 냈지만, 장기적으로는 일본 제조업의 한계를 드러내는 요인이 되었다. 실제로 1990년대 들어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하는 기술 혁신 기업들이 두각을 나타내자, 일본 기업들은 창의성 부족으로 인해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 제조업이 세계무대에서 위상을 점차 잃어가는 원인 중 하나로 꼽혔다.
혁신이 결여된 채 안주한 일본 기업들은 한국, 중국 등 신흥 제조업 강국의 추격과 미국 중심의 혁신 기업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삼성, LG와 같은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산(産) 전자제품을 대체하고, 중국은 대규모 생산과 저렴한 가격으로 일본 제품을 압박했다. 또한 애플, 구글, 아마존 같은 미국 기업들이 소프트웨어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새로운 사업 모델을 선도하는 동안, 일본은 이에 편승하지 못하고 전통적인 제조업에 머무는 전략적인 실수를 범했다. 그 결과 ‘제조 강국’의 지위는 한국, 중국에 뺏기고, ‘기술 강국’은 미국 등에 내주고 말았다.
일본 기업들이 혁신에서 뒤처진 원인 중 하나는 경직된 조직문화에 있다. 일본 기업들은 전통적으로 상명하달식의 의사결정 구조에 익숙했다. 이러한 구조는 새로운 아이디어나 실험을 장려하기보다는 ‘합리화’와 ‘표준화’를 강조하는 기존의 틀 안에서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 기업이 초기에 안정적인 품질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으나, 창의성과 혁신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는 걸림돌로 작용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 기업의 성공과 몰락은 현재 위기를 겪고 있는 삼성전자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삼성전자는 오랜 기간 동안 전자제품과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유지해왔지만, 최근 들어 기술 혁신 속도가 둔화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주력인 반도체는 인공지능 메모리(HBM)에서 경쟁사에 비해 열세를 보이고 있다. 범용 메모리는 중국의 대규모 투자와 기술 추격이 턱밑까지 도달한 상태다. 또한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공을 들이고 있는 시스템 반도체 부문은 혁신 부재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당면한 위기 극복을 위해서 삼성전자는 과거 일본 기업들이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일본의 경직된 조직문화와 상명하달의 의사결정 구조가 혁신을 저해했던 것처럼, 삼성 역시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환경에 맞춰 조직의 유연성과 창의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전의 성공 사례에서 과감하게 탈피해 실리콘밸리식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지금 삼성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성공 방정식’이 아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진취적인 조직으로 전환이다.
이원호 비즈빅데이터연구소장(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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